잡스의 넥스트 시절에서 배울 것
〈포춘〉 촬영에 함께한 스티브 잡스와 핵심 측근들. 왼쪽부터 디자인 수장 조너선 아이브, 소프트웨어 책임자 애비 테바니안, 하드웨어 수장 존 루빈스타인, 애플리케이션 총괄 시나 타마돈. 2001년 12월 19일.
넥스트를 떠난 지 14년 뒤, 폴 바이스는 소노마 밸리에서 와인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자녀들의 학교를 매개로 스티브를 포함한 넥스트 동료들과 유대 관계를 유지했다. 2011년 9월의 어느 날, 그는 학교 개학 행사에서 로렌과 만났다.
로렌이 그를 잡스 가족의 집으로 초대했다. 폴은 수락하고, 자기 회사의 와인을 가져갈 계획을 세웠다.
2011년 10월 5일, 폴은 와인 병을 차에 싣고 스티브와 로렌의 집으로 향했다. 운전 중에 로렌에게서 전화가 왔다.
스티브가 방금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날 오후 3시경, 그는 초기에는 치료하지 않고 방치했던 췌장암에 굴복했다.
소식은 문자 메시지와 전화를 통해, 그리고 넥스트 동문 메일링 리스트를 통해 커뮤니티 전체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많은 이들이 복잡한 슬픔을 느꼈다. 그들은 자신들을 소모품처럼 취급하고, 회의에서 모욕을 주며, 가장 똑똑하고 뛰어난 인재들을 초라하게 만들었던 천재 밑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잡스가 한 행동을 용서하지 못한 채 수십 년 동안 그 상처를 안고 살아왔다.
그의 죽음이 그것을 바꾸기 시작했다.
전직 넥스트 영업 매니저 마크 헤이즈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했지만, 자기 안에서 일어난 일은 정확히 기억했다. “제 안에 꾹꾹 담아두었던 많은 분노를 털어낼 수 있었습니다”라고 그는 회상했다. 20년간 품어온 원망이 갑자기 갈 곳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의 재능과 그가 이뤄낸 성취들을 더 호의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전직 넥스트 마케팅 디렉터 론 와이스만은, 스티브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객 미팅을 나와 차 안에서 40분간 마비된 듯 멍하니 앉아 있었다. “스티브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10월 16일 스탠퍼드 메모리얼 교회에서 열린 스티브의 비공개 추모 예배에서, 마이크 슬레이드는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매우, 매우 감동적이고 매우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마이크는 수백 명의 조문객 사이에서 빌 게이츠 옆에 앉았다.
스티브는 자신의 병을 거의 모든 사람, 심지어 마이크를 포함한 가장 가까운 친구와 동료들에게까지 숨겼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현실 왜곡장을 유지한 것이었다. 그것이 많은 이에게 슬픔과 함께 배신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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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는 13년 전인 1998년, 스티브가 전화를 걸어 애플에서 다시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던 때를 떠올렸다. “당신의 능력을 제가 얻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빌리고 싶어요”라고 스티브는 말했다.
당시 시애틀에 거주하며 디즈니에서 일하고 있던 마이크는, 넥스트의 하드웨어 부문이 붕괴된 후 회사를 떠난 상태였다. 그 후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 창업자 폴 앨런이 그를 고용해 스타웨이브라는 웹 회사를 경영하게 했고, 이 회사는 10억 달러가 조금 넘는 금액에 디즈니에 매각되었다. 닷컴 붐의 성공 사례 중 하나였다.
스티브는 마이크에게 애플의 제품 전략과 브랜딩에 대해 조언하는 특별 보좌관 역할을 제안했다. 디즈니의 사내 정치에 지쳐 있던 마이크는, 오히려 스티브를 안전한 피난처로 여겼다. 그는 스티브와 함께 일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마이크는 “우리는 서로에게 반해 있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마이크에게는 어린 자녀들이 있었고 시애틀에 정착한 가족을 이주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자 스티브는 그를 배려하여 이례적으로 파트타임 자리를 제안했다. 마이크는 이를 수락했고, 이를 두고 “제 전체 경력을 통틀어 가장 편안하고 재미있는 일이었습니다”라고 평가했다.
이후 6년 동안 마이크는 매주 월요일 아침 시애틀에서 비행기를 타고 내려왔다가 수요일에 돌아갔다. 그는 회의마다 스티브를 밀착 수행하며, 넥스트스텝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운영체제 맥 OS X를 설계하고, 애플의 부활을 상징할 핵심 앱들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웹 분야에서 쌓은 풍부한 경험 덕분에 마이크는 회사에 독보적인 시각을 제공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애플에서 저 말고는 인터넷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라고 마이크는 말했다. 다른 모든 이들이 여전히 웹이 무엇인지 파악하려 애쓰는 동안, 마이크는 음악 유통부터 소프트웨어 업데이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패러다임을 바꿀 온라인 미래 전략을 스티브가 계획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애플 고위 임원들은, 마이크가 정확히 누구인지, 왜 자신들의 극비 회의에 참석하는지 알지 못했다. 임원들이 몇 시간 동안 격렬하게 논쟁하는 동안 그는 조용히 앉아 있었고, 그러다 스티브가 갑자기 그를 돌아보며 “마이크, 당신 생각은 어때요?”라고 묻곤 했다.
그러면 테이블 주변의 임원들은 일제히 혼란스러운 눈빛을 교차시켰다.
마이크는 스티브의 극적인 변화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는 특권도 누렸다. 그는 이 시점의 스티브가, 과거 넥스트를 거의 파산 지경으로 몰고 갔던 그 독선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는 잡스의 가장 까다롭고 결함 많던 성격들이 뒤로 물러나는 것을 목격했다. “너 해고야”라며 발작적으로 화를 내던 고질병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물론 스티브는 여전히 완벽을 요구하는 엄격한 상사였다. 하지만 그 완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더 이상 부하 직원들에게 인격적 모욕을 주지는 않았다. 그는 또한, 조직 내 원망과 치졸한 사내 정치를 낳았던 넥스트 시절의 ‘임금 공개 정책’을 치워버렸다.
그는 통제권을 내려놓는 법을 배웠고, 애비와 존, 마이크, 버드(2002년 소프트웨어 기술 부사장으로 애플에 복귀해 과거 자신의 제자였던 애비 밑에서 일하게 됨) 같은 핵심 참모진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월요일 아침 스태프 미팅에서 스티브는 이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그들의 조언을 실제 경영에 반영했다.
조직 환경이 개선되면서, 그는 임원들이 끊임없이 갈려 나가던 애플의 고질적인 ‘회전문 인사’를 끝낼 수 있었다. 그는 애플에서 핵심 임원진 체제가 무려 8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도록 이끌었다. 마이크는 이를 두고 “믿을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이라고 표현했다.
마이크는 “스티브는 넥스트에서 정말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다시는 그중 어느 것도 반복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한 상태였습니다”라고 관찰했다.
넥스트 교훈 하나 : 실패를 반복하지 마라
몇 주 동안, 경영진은 애플이 기존의 고급 컴퓨터 대신 입문형의 사용하기 쉬운 제품을 개발해야 하는지를 놓고 논쟁했다. 스티브는, 친구 래리 엘리슨이 애플에 제안했던, 인터넷에서 모든 데이터를 끌어와 쓰는 ‘디스크가 없는 네트워크 컴퓨터(단말기)’ 개발에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하드웨어 책임자 존은 반대했다. 디스크가 없다는 것은 넥스트 큐브의 광학 드라이브 참사를 떠올리게 했다. “하드 드라이브 없는 넥스트 기기는 잘 안 됐잖아요”라고 존은 주장했다. “이것도 잘 안 될 겁니다.”
긴장은 마침내 존이 “치고받고 끌고 가는 육탄전”이라 부른 수준으로 격렬해졌다. 그런데 돌파구가 되는 타협안이 나왔다. 네트워크 컴퓨터의 마더보드를 유지하되, 계획했던 반투명 케이스를 하드 드라이브가 들어갈 만큼만 키우면 어떨까?
매우 대담하게도, 존은 애플의 일반적인 개발 기간인 3년 대신 단 14개월 안에 이를 제품화하겠다고 공언했다. 엔지니어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존은 “모두가 ‘그건 불가능해요’ 하고 손사래를 쳤습니다”라고 회상했다. 그렇게 애플의 전설적인 아이맥(iMac)이 탄생했다.
넥스트 교훈 둘 : 때로는 비전을 굽혀야 한다
애비가 랩소디 프로젝트를 통해 넥스트스텝이 애플 컴퓨터에서 돌아가도록 하는 작업을 하면서, 어도비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매킨토시 개발자를 행복하게 붙잡아둘 창의적인 해결책을 내놓아야 했다. 그들은, 새로운 운영체제를 위해 그들의 방대한 소프트웨어를 처음부터 다시 작성하라고 하면 반발할 것이었다.
그래서 애비의 팀은 블루 박스라는 이름의 가상환경을 구축했다. 이는 새로운 운영체제 내부에서 기존 매킨토시 운영체제를 통째로 구동시키는 방식으로, 새로운 생태계가 정착되는 동안 과거의 소프트웨어들이 그 안에서 유연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숨통을 터준 것이다.
이러한 지극히 실용적인 접근 방식은, 애플이 넥스트의 소프트웨어 개발 도구를 이식하고 다루는 방식을 규정하게 되었다. 이후 10년 동안 애플은 넥스트의 소프트웨어 구축 프레임워크를 정돈하여, 매킨토시 컴퓨터용 개발 도구인 ‘코코아(Cocoa)’와 아이폰용 터치 최적화 도구인 ‘코코아 터치(Cocoa Touch)’라는 강력한 두 가지 툴킷으로 발전시켰다.
스티브가 원래 1988년에 일으키고자 했던 넥스트 혁명은, 19년이 지난 후 첫 번째 아이폰이 세상에 나오면서 마침내 온전한 결실을 맺게 되었다.
사실 블루 박스 같은 타협적인 우회책을 허용하는 것은, 과거의 고집스러운 스티브 성격에는 전혀 맞지 않는 일이었다. 넥스트 시절에 그는 개발자들에게 오직 자신의 플랫폼만을 위해 소프트웨어를 완벽히 새로 짤 것을 강요했고, 이러한 순혈주의적 고집은 결국 앱 부족이라는 생태계 고사로 이어졌었다. 이제 애플에서 그는 실용주의를 수용했다. 더 많은 소프트웨어는 더 많은 사용자를 의미했고, 다시 더 많은 개발자를 끌어들여, 과거 넥스트 시절에는 결코 만들지 못했던 강력한 플랫폼의 선순환을 만들어냈다.
넥스트 교훈 셋 : 사람들의 말을 들어라
넥스트 이후, 스티브는 단지 ‘옳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고객의 현실적 요건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컴퓨터를 만들어놓고도 매장에서 먼지만 쌓이는 것을 보게 된다. 존과 스티브는 이 교훈을, 애플의 방대하고 엉망진창이었던 기존 제품 라인업을 정리하는 데 적용했다. 애플의 피를 말리던 실적 부진 모델들과 과거의 쓸모없는 찌꺼기 제품들을 가차 없이 퇴출시켰다. 그리고 그 자리에 모든 자원을 집중시켜, 과거 넥스트가 추구했던 극도의 단순함에 경의를 표하는 반투명한 본디 블루 색상의 아이맥을 완성했다.
1990년대 초 다른 컴퓨터들이 투박한 픽셀과 거친 모서리로 텍스트를 표시할 때, 넥스트 화면은 마치 고급 잡지에 인쇄된 것처럼 칼날처럼 선명한 글꼴을 보여주었었다. 스티브는, 전문 인쇄소에서 쓰던 그 포스트스크립트 기술을 라이선스하여 애플의 데스크톱 컴퓨터에 이식했다. 그 결과물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지만, 폰트 처리를 위해 웬만한 일반 컴퓨터 한 대 값보다 비싼 전용 칩을 박아야만 했었다.
아이맥이 1998년에 출시될 때쯤, 컴퓨터 칩은 극적으로 빨라지고 저렴해졌다. 한때 비싼 커스텀 하드웨어가 필요했던 것이 이제 표준 프로세서에서 구동될 수 있었다. 넥스트 기기를 터무니없이 비싸게 만들었던 기술이 소비자 제품에 적합한 가격이 된 것이었다.
30년이 지난 오늘날, 아이폰에서 핀치 줌을 하면 어떤 크기에서든 텍스트가 칼날같이 선명한 것은, 과거 넥스트의 디스플레이 포스트스크립트의 증손자 격인 ‘쿼츠’와 ‘코어 그래픽스’ 기술이 사치스러운 가격표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우리 주머니 속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이맥에는, 당시 기준으로 이단적이었지만 플로피 드라이브가 없었고 USB 포트만 있었다. 그것은 일반 대중이 아주 쉽게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도록 특별히 기획된 컴퓨터였다. 그리고 1,299달러로 경쟁사보다 저렴했다. 스티브가 마침내 일반인을 위한 하드웨어 마케팅법을 배운 것이었다.
1998년 8월 출시된 아이맥은 첫 5개월간 80만 대가 팔렸고, 넥스트 인수 이후 처음으로 애플을 흑자로 전환시켰다.
동시에, 넥스트의 비싼 기술들도 애플의 제품 포트폴리오에서 새 생명을 찾았다. 넥스트에서 라이선스당 5만 달러 이상이었던 엔터프라이즈 프레임워크인 웹오브젝트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애플의 온라인 스토어를 구동했다. 1999년까지 애플은 같은 웹오브젝트 소프트웨어를 699달러에 팔다가 나중에는 결국 무료로 배포했다. 그 기술은, 아이튠즈 구매를 아이팟에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신경계가 되었다.
정식 맥 OS X가 나오기 2년 전인 1999년 3월, 맥 OS X 서버가 출시되면서 애플은 넥스트에서 만들어진 소프트웨어 기반을 더 넓은 청중에게 가져다주었다. 수십 명의 애플 및 전직 넥스트 엔지니어들은, 맥 OS X 서버가 본질적으로 친숙한 매킨토시 인터페이스가 위에 덮인 넥스트스텝이라고 회고했다.
넥스트 큐브의 유령은 2000년에 다시 나타났다. 스티브가 파워 맥 G4 큐브를 출시한 것이다. 강력하고 반투명한 크리스탈 컴퓨터였다. “네, 전에 하나 만들었었죠”라고 그가 〈뉴스위크〉에 말했다. “큐브는 매우 효율적인 공간입니다.”
모니터 없이 1,799달러로, 넥스트에서의 전작처럼 실패했다. 어떤 습관은 다른 것보다 고치기 어렵다.
넥스트 교훈 넷 : 완전한 통제에는 완전한 역량이 필요하다
1990년대에 개인용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은, 교통 체증 한가운데서 갑자기 시동이 꺼질 수 있는 차를 모는 것과 비슷했다. 예전 매킨토시 운영체제는 너무 자주 다운되어서 사람들이 편집증적으로 몇 분마다 작업을 저장했다. 월스트리트의 트레이딩 시스템을 구동하는 유닉스와 같이 견고한 소프트웨어 기반 위에서 만들어진 넥스트 기기는, 그렇게 쉽게 다운되지 않았다.
문제는, 유닉스가 난해한 명령어를 이해하는 컴퓨터 과학자에게만 친숙하다는 것이다. 애플이 날린 신의 한 수는, 이 방탄조끼처럼 튼튼한 기반 위에 친근한 얼굴을 올려놓은 것이었다. 훗날 숨 막힐 정도로 복잡한 스마트폰을 단순하게 느끼게 만들 같은 마법이었다.
2001년 3월, 애플은 맥 OS X를 출시했다. 본질적으로 매킨토시 화장을 한 넥스트스텝이었다. 이것이 정확히 애플이 넥스트를 산 이유였다. 낡아가는 운영체제를 대체할 현대적 기반. 스티브는 이를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운영체제”라고 마케팅했다. 안정적이고, 강력하고, 아름다웠다.
이것은 또한, 애플의 운명을 뒤집을 돌파구의 초석을 놓았다. 존이 일본 출장 중, 도시바 임원들이 PC에 사용하기에는 용량이 부족한 작은 하드 드라이브를 보여주었다. 존의 머릿속에서 ‘이게 아이팟을 만들 방법!’이라는 전구가 켜졌다.
스티브도 마침 일본에 있었고, 존이 바로 전화했다. “스티브, 이걸 개발하려면 1,000만 달러짜리 수표가 필요합니다”라고 그가 말했다. 스티브는 망설이지 않았다. “문제없어요.”
아이팟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서비스가 매끄러운 하나로 작동하는 넥스트의 철학을 보여주었다. 소프트웨어는 맥 OS X에서 가져왔고, 아이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를 갖추었으며, 아이튠즈에 쉽게 연결되었다. 처음으로, 주머니에 천 곡의 노래를 넣고 다니면서 파일 형식이나 호환성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정확히 스티브가 꿈꿔왔던, 기술이 좋아졌지만 사실상 보이지 않고, 사용자 경험이 남은 것이었다.
2003년 4월, 애플은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를 출시했다. 스티브는 편집증적인 음반사들을 설득하여 곡당 99센트에 온라인 판매하게 했지만, 진정한 승리는 스토어의 백엔드에 있었다. 스토어는, 대규모 트랜잭션을 처리할 수 있도록 확장된 웹오브젝트 위에서 돌아갔다. 첫 주에 100만 곡 이상을 판매한 뒤, 넥스트의 엔터프라이즈급 도구가 대규모 일반 소비자 서비스에 적용될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
현업에서 떠나 곁에서 지켜보던 전직 넥스트 직원들에게, 자신들의 기술이 입증된 것은 달콤했다. 자신들의 ‘실패한’ 회사의 프레임워크가 애플의 혁명을 구동하는 보이지 않는 엔진이 된 것이었다. 넥스트를 거의 죽일 뻔했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통합 전략이 마침내 제 시대를 만나 빛을 발한 것이다.
스티브는 2005년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 축사에서 넥스트에서 배운 것을 회고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쫓겨난 것이야말로 제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습니다. 성공이라는 무거움이 걷히고, 모든 것이 불확실한 초심자의 가벼움이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덕분에 저는 제 생애의 가장 창조적인 시기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다음 5년간, 넥스트라는 회사를 시작하고, 픽사라는 또 하나의 회사를 시작했으며, 나중에 저의 아내가 되는 놀라운 여성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픽사는 세계 최초의 완전 컴퓨터 애니메이션 장편 영화인 〈토이 스토리〉를 만들었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되었습니다.
믿을 수 없는 반전으로, 애플이 넥스트를 인수했고, 저는 애플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넥스트에서 개발한 기술이 르네상스를 맞은 애플의 심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렌과 저는 멋진 가족을 이루고 있기도 합니다.
제가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더라면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확신합니다. 끔찍한 맛의 약이었지만, 환자에게 필요했던 것이었습니다.
살다 보면 가끔은 인생이 난데없이 벽돌로 뒤통수를 후려칠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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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9일 맥월드에서, 스티브가 다시 무대에 올랐다. “오늘, 세 가지 혁명적 제품을 소개하려고 합니다”라고 그가 시작했다. “첫 번째는 터치 컨트롤을 갖춘 와이드스크린 아이팟입니다. 두 번째는 혁명적인 모바일 폰입니다. 세 번째는 획기적인 인터넷 통신 장치입니다.”
그가 멈추었다. “감이 오셨나요?” 그가 물었다. “이것은 독립적인 세 개의 장치가 아닙니다. 하나의 장치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아이폰이라 부릅니다.”
막후에서, 이 출시 전날, 스티브는 AT&T 이사회에 아이폰을 보여주었다. 당시 아이폰 개발에 참여했던 버드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의 턱이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아이폰 이야기는 인내의 역사였다. 넥스트에서 스티브는 생존을 위해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인텔 칩과 자기가 혐오하는 디자인의 베이지색 상자의 PC 제조사를 위한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것이었다. 전 넥스트 직원과 애플 임원들에 따르면, 1997년 애플에 복귀했을 때 그는 그의 비전으로부터 전술적 후퇴를 했다. 인텔 프로세서를 유지하고, 이동통신사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기존 공급망 안에서 일하면서. 하지만 각 타협은 스티브에게 더 큰 것을 구축할 시간과 자원을 벌어주었다.
2007년이 되자, 10년간의 인내심이 결실을 맺었다. 스티브는 아이폰으로 마침내 중요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었다. 애플이 결국 칩 아키텍처를 설계할 것이었다. 애플은 신중하게 관리된 파트너를 통해 제조를 통제했다. 애플은 AT&T가 폰을 보기도 전에 수용하게 만들면서 이동통신사에 조건을 정했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서비스, 심지어 리테일 스토어까지 쿠퍼티노의 애플 본사가 통제했다.
넥스트에서 스티브는 충분하지 않은 자원으로 첫날부터 모든 것을 통제하려 했다. 애플에서는 먼저 자원을 확보한 뒤 통제권을 장악했다. 아이폰은, 스티브의 전체 기술 스택 전략이 시행할 힘이 있는 한 작동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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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아이폰이 출시되었을 때, 넥스트의 전직원들은 “엑스넥스터즈”라는 메일링 리스트에서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애플이 자신들이 1994년에 넥스트에서 만들었던 ‘혁명적’ 기능을 발표할 때마다 비꼬는 유머를 나누었다.
아이폰의 운영체제와 개발 도구, 기반 아키텍처의 상당 부분이 10년 전 그들이 작성한 코드와 앱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실제로, 애플의 일부 코드 속에는 “NS”라는 이니셜이 묻혀 있었다. “NeXTSTEP”을 가리키는 약어였다. 넥스트는, 스티브가 언젠가 자신의 인생 업적에 대해 예측했던 모습 그대로가 되었다. 즉, 컴퓨팅 역사의 한 퇴적층이 된 것이다.
그때까지, 회사 퇴사자들은 씨앗처럼 실리콘밸리 전역에 흩어져 있었고, 그들의 넥스트 경력은 어느 회사에서든 환영받았다. 대니얼은 마이크로소프트 CEO 스티브 발머에 의해 수석 부사장으로 스카우트되었다. 수전은 수술 로봇 회사 인튜이티브 서지컬의 CFO가 되었다. 리치는 초보틱스의 회장이 되었는데, 이 회사는 천 가지 조합의 샐러드를 조립할 수 있는 자판기 “샐리 더 샐러드 메이킹 로봇”을 만들었고, 도어대시가 2021년에 인수했다. 실리콘밸리에서 이력서에 있는 넥스트라는 단어는 ‘스티브의 지옥훈련을 통과한 생존자’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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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사망 몇 주가 지난 뒤, 거의 200명의 엑스넥스터들이 떠난 회장을 추모하기 위해, 원래 넥스트 본사가 있던 곳인 레드우드 시티의 소피텔 샌프란시스코 베이 호텔에 모였다. 방 안에는 복잡한 에너지가 흘렀다. 슬픔과 묵은 원망이 섞이고, 사랑과 해결되지 않은 분노가 얽혀 있었다. 이들은 스티브의 가장 잔인했던 시절의 생존자들이었다.
전직 영업 부사장 토드 룰론밀러가 연단에 섰다. 그는 수십 년간 알아온 얼굴들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어떻게 마음을 정리해야 할지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라고 그가 시작했다. “아직 극복 중입니다.”
토드는, 스티브가 125페이지짜리 계약서를 IBM 임원들이 보는 앞에서 테이블에 던져버렸던 IBM 미팅을 회상했다. 방 안에 웃음이 퍼졌다. 큐브의 색상을 놓고 끝없이 벌인 논쟁을 떠올리고, 넥스트가 컴퓨터를 팔지 못하는 무능력에 대해 로스 페로가 자신에게 소리치던 것을 회상했다. 토드가 짧게 로스의 텍사스 사투리를 흉내 내자 웃음이 터졌다.
“스티브는 늘 의견을, 관점을 요구했습니다. 선언하라, 결정하라, 행동하라(declare, decide, do)”고 토드는 말했다. “스티브 밑에서는 모든 동사가 능동태였습니다.”
청중은 이 스티브를 잘 알고 있었다. 요구하는 완벽주의자. 하지만 이어서 토드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그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라고 그가 말한 뒤, 잠시 침묵했다. “신중히 숨겨진 마음.”
어딘가에 그 마음을 숨긴 스티브도 그들은 알고 있었다.
토드는 21년 전의 비즈니스 디너를 떠올렸다. 넥스트의 대학 고객들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스티브가 나타나지 않았던 그 밤, 그는 로렌 파월이라는 대학원생과 저녁을 먹기 위해 미팅을 날려버린 것이었다.
일부 냉소적인 사람들은 스티브의 변신이 연출된 것이라 했다고 토드는 말했다. 하지만 넥스트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 뒤 20년간 그를 지켜보았다. 그것이 진짜라는 것을 알았다. 세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생일을 기억하고 축구 경기를 코치하는 사람이 되었다.
“스티브 잡스에게서는 절대 예상하지 못했을 모습”이라고 토드는 인정했다.
토드가 잠시 멈추었다.
“그는 저의 미래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요약하면: 대담하고 결연하며, 창조적이고 예술적이며, 못처럼 강인하고 배려심 깊은. 네, 그는 제 친구였고, 그가 미치도록 그립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