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리터러시, 생각의 외주화
AI의 답변을 정답인 것처럼 여기고 퍼 나르거나 자기주장의 근거로 삼는 일이 챗GPT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끊이지 않는다. 매일 약을 먹어야 하는 환자가 AI의 말을 듣고 약을 끊고, 법정에서는 원고와 피고가 서로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AI에게 물어 제출한다. 일본에서는 한 프로야구 감독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까지 있었다. 두 딸의 다툼을 말리던 아버지가 큰딸과 실랑이를 벌였는데, 큰딸이 챗GPT에 상담한 뒤 그 답에 따라 아동상담소에 알렸고, 통보를 받은 경찰이 아버지를 현행범으로 체포한 것이다. 조사를 받고 풀려났지만 구단과 본인의 명예 실추를 견디지 못한 그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법률가들이 인용한 AI 판례의 오류, 연구 논문의 참고문헌 오류도 단순 실수로 보기에는 파장이 너무 크다. 관련 보도가 끊이지 않는데도 오늘도 AI가 써준 답변을 복사해 붙여넣는 사회 지도층과 전문가가 적지 않다.
이 모든 일에는 공통의 뿌리가 있다. 생각해야 할 자리에서 생각을 멈추고, 그 자리를 기계에 넘겨버린 것이다. ‘생각의 외주화’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분명히 해두자. 생각의 외주화는 일부 부주의한 사람의 실수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빠지기 쉬운 자연스러운 경향이다. 편리함 앞에서 머리를 덜 쓰려는 것은 본능에 가깝다.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다 담을 수 없는 것들을 외부에 위탁해왔다.
기원전 4세기, 소크라테스는 제자 파이드로스에게 이집트 신화 하나를 들려준다. 발명의 신 테우트가 문자를 만들어 타무스 왕에게 바치며 이것이 사람들을 더 지혜롭게 하고 기억을 늘려줄 것이라 자랑하자 왕은 정반대로 답한다.
“문자는 배우는 이의 영혼에 망각을 심을 것이다. 사람들은 안에서 스스로 기억해내는 대신 바깥의 기호에 의존하게 될 테니.”
글이라는 신문물 앞에서 인류가 처음 던진 경고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경고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이유는 글로 적혀 있기 때문이다. 위탁의 도구가 위탁의 위험을 기록해 살아남은 셈이다.
타무스의 걱정은 절반만 맞았다. 우리는 전화번호를 외우지 않고, 길을 머릿속에 그리는 대신 내비게이션을 따라가며 암산 대신 계산기를 두드린다. 주판 세대는 전자계산기 앞에서 암산을 잊었고, 손편지 세대는 자판 앞에서 악필이 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와 달리, 우리는 한글 전용을 하면서 한자를 잊었다. 그렇다고 인류가 어리석어진 것은 아니다. 번호를 외우고 지도를 떠올리며 계산에 쓰던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쓸 수 있었다. 기억과 계산을 바깥에 맡긴 덕분에 인간은 더 고차원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다.
다만, 우리가 그동안 도구에게 위탁한 것은 기억과 계산이었지 판단이 아니었다. 계산기는 숫자를 내놓을 뿐 투자를 결정하지 않았고, 내비게이션은 길을 안내할 뿐 어디로 갈지 정하지 않았으며, 사전은 단어의 뜻을 알려줄 뿐 그 단어를 쓸지 말지 고르지 않았다. 방향을 정하고 결과의 의미를 읽는 일은 늘 사람의 손에 남아 있었다.
도구는 사람의 판단을 받들었지, 대신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