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성장 05] 마블, 아이언맨 회사를 살리다
기업의 성공 여부는 시장의 변화에 얼마나 적절하게 대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 존 체임버스John Chambers, 전 시스코Cisco 회장 겸 CEO
1939년 만화책의 첫 황금기에 설립된 타임리 퍼블리케이션스Timely Publications(마블의 1961년 이전 사명)을 살펴보자. 당시 이들은 슈퍼맨과 배트맨의 본가인 막강한 DC 코믹스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언제나 2인자 위치였지만 재무 상태는 건실한 기업이었다.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캡틴 아메리카를 필두로 여러 인기 캐릭터가 등장한 것이 계기였다. 마블은 이를 발판 삼아 시장에서 독자적 영역을 구축할 수 있었다.
1950년대에는 정부의 만화책 윤리성 조사가 있었다. 1960년대에는 베이비붐 세대가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경쟁사가 사라졌지만 마블은 끝까지 버텼다. 오히려 마블은 잭 커비Jack Kirby와 스탠 리Stan Lee 같은 새로운 창작자를 기용했다. 이를 통해 DC 코믹스를 맹렬히 추격했다. 마블 특유의 독창적이고 파격적인 캐릭터와 이야기는 새로운 세대의 팬들을 열광시켰다. 이는 종교에 가까운 강력한 팬덤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1993년부터 성장이 멈추기 시작했다. 경영진은 근시안적이고 막대한 비용이 드는 결정을 남발했다. 이는 고스란히 빚더미로 돌아왔다. 50년 넘는 역사와 헐크, 엑스맨, 판타스틱 포, 스파이더맨 등 5천 개가 넘는 캐릭터를 보유한 브랜드가 어쩌다 위기를 맞게 된 걸까? 재앙은 너무나 순식간에 닥쳤다.
당시 경영진은 결정적 순간에 시장 맥락을 완전히 잘못 읽었다. 만화책과 카드 교환 시장이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가격을 계속 올렸다. 가판대 시장의 몰락이 가져올 파장도 예상하지 못했다. 가장 활발했던 고객층인 수집가들이 시장을 떠나는 신호도 놓쳤다. 심지어 제품의 질까지 떨어뜨리는 실수를 범했다. 경영진의 내부 파벌 싸움까지 더해지면서 이 상징적인 브랜드는 안팎으로 완벽한 폭풍을 맞았다.
열성적인 팬덤과 평단의 찬사도 재앙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1996년 12월 27일, 마블은 파산 보호 신청을 했다. 직원의 3분의 1이 해고되었고 막대한 부채가 남았다. 2000년 한 해에만 1억 500만 달러의 손실을 기록했다. 마블은 불투명한 미래와 함께 새로운 세기를 맞이했다.
아이언맨 : 비주류 캐릭터의 반란
2008년 〈아이언맨〉이 전 세계 극장을 휩쓸었을 때, 마블은 부활 수준을 넘어 캐릭터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글로벌 강자로 우뚝 섰다. 마블이 일궈낸 이 기적은 변화하는 시장 맥락 속에서 적절한 성장 경로를 정교한 실행 순서와 조합으로 실행한 결과다. 이 전략은 너무나 성공적이었고, 최근 몇 년 동안 마블은 시장의 맥락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바꿔버렸다.
비결은 간단했다. 마블은 브랜드의 진짜 가치가 만화책이 아니라 캐릭터 자체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97년 토이 비즈와 마블 엔터테인먼트 그룹이 합병하며 파산 상태를 벗어났고, 마블 엔터프라이즈가 탄생했다. 이후 몇 년간 적자가 이어졌지만 마블은 성장을 위해 고객 및 제품 다각화와 제품 라인업 확장이라는 명확한 비전을 세웠다.
이 성장 경로들의 핵심은 기존 시장과 신규 시장 그리고 모든 고객을 대상으로 제품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마블이 이 경로들을 선택한 것은 경쟁이 치열한 신규 시장에 뛰어들거나 미개척 분야에 투자하기 위해 회사의 운명을 거는 수준의 위험을 감수한 도박이었다.
말은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 아주 간단하다. 이 사례에서 고객 및 제품 다각화는 새로운 독자층(고객)을 위한 신규 캐릭터 제작에만 집중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블은 더 큰 승부수를 던졌다. 마블은 본업인 핵심 사업을 유지하며 혁신을 시도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기존 자산(제품)을 활용한 것이다. 바로 마블만의 독보적인 상징적 캐릭터들이다. 이 캐릭터들은 이미 충성도 높은 고객층을 확보하고 있었다. 덕분에 마블은 자신의 자산들을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다른 매체를 고민했다. 그렇게 제품을 다각화하기로 했고 결국 영화를 선택했다.
하지만 세계적인 브랜드 파워를 가진 대기업인 마블도 고객 및 제품 다각화를 추진하다가 큰 손해를 본 적이 있다. 테마 레스토랑인 마블 마니아, 인터랙티브 CD-ROM, 스카이박스와 함께한 트레이딩 카드(카드 교환) 사업 등이 대표적이다. 1998년에 문을 연 마블 마니아 1호점은 불과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CD-ROM과 트레이딩 카드 계획은 빛조차 보지 못했다. 처음 아이디어를 논의할 때는 좋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 출시 시점에는 이미 시장 맥락이 변해 있었다.
마블은 시장 환경의 변화를 깨달았다. 하지만 여전히 제품을 다각화하고 싶었고 대안을 찾아 나섰다. 그 결과 마블은 영화 제작사들과 손을 잡기로 했다. 파트너십 경로와 고객 및 제품 다각화 경로를 결합해 추진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전의 시도들처럼 이 노력 역시 잘못된 판단이었음이 드러났다.
엔터테인먼트와 미디어 비즈니스에서 충성도 높은 핵심 팬층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보통 전체 사용자의 10~20퍼센트에 불과한 이들이 프랜차이즈 전체 가치의 80퍼센트 이상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콘텐츠 전략은 이들을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데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핵심 팬들과의 유대감을 깊게 다지는 동시에, 이들의 열정을 발판 삼아 브랜드를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해나가야 한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스파이더맨, 엑스맨, 블레이드 같은 캐릭터들이 20세기 폭스나 소니와 맺은 라이선스 계약은 엄청난 수익을 안겨줬다. 하지만 그 이득은 영화사들의 몫일 뿐, 마블의 것이 아니었다. 영화 〈블레이드〉는 적당히 성공했다. 〈엑스맨〉은 슈퍼히어로 영화의 전성기를 다시 열었다. 〈스파이더맨〉은 4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러나 〈블레이드〉가 미국 박스오피스에서 7천만 달러를 벌 때 마블이 손에 쥔 돈은 고작 2만 5천 달러에 불과했다. 〈엑스맨〉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류상으로는 훌륭한 아이디어였을지 모르나 새로운 전략 없이는 제 살 깎아먹기에 불과했다. 마블이 맺은 파트너십 구조는 파트너 사에는 막대한 매출을 주었지만 마블에는 비참한 결과만 남겼다.
가장 어두운 시기, 마블은 위기를 벗어날 해결책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던 중 2003년 인데버Endeavor의 콘텐츠 에이전트 데이비드 메이젤David Maisel이 마블에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최고의 자산을 다른 회사에 헐값으로 넘기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제작 스튜디오를 직접 차리면 수천 개의 캐릭터와 줄거리를 활용해 영화나 비디오 게임 같은 새로운 매체로 진출할 수 있고 동시에 충성도 높은 고객 기반까지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러면 수익도 100퍼센트 독점할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마블은 고객 및 제품 다각화로 완전히 방향을 틀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영진을 포함한 인적 구성, 제품, 자산 투자 등 모든 면에서 대대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고민 끝에 마블은 어벤져스를 포함한 핵심 캐릭터 10명을 담보로 잡혔다. 그리고 메릴린치와 7년간 5억 2,500만 달러 규모의 계약을 맺었다. 그렇게 마블 스튜디오가 탄생했다. 당시 마블의 선택은 말 그대로 기업의 존립을 건 도박이었다. 영화가 흥행에 실패했다면 마블은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영화 흥행을 통한 자금 수혈 덕분에 마블은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운 좋게도 계약 체결 두 달 뒤 뉴라인 시네마가 보유했던 아이언맨 판권이 마블로 돌아왔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아이언맨은 메릴린치 계약에 포함된 10명의 캐릭터가 아니었다. 영화를 만들려면 마블이 직접 자금을 조달해야 했다. 그럼에도 마블은 단호했다. 마블은 실사 영화로 제작된 적 없는 캐릭터로 첫 단추를 끼우고 싶어 했다. 아이언맨이 적격이었다. 그 이후의 일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2008년에 개봉한 〈아이언맨〉은 5억 8,500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역대 최고 흥행작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이후 아이언맨 시리즈는 전 세계적으로 약 25억 달러의 박스오피스 수익을 거둬들였다. 이 성공은 마블의 화려한 부활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또한 최대 경쟁사인 DC 코믹스를 압도하며 영화계의 패권을 장악하는 발판이 되었다.
마블 유니버스
마블이 이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거나 적절한 조합과 실행 순서를 결합하지 못했다면 결과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약간의 운도 따랐지만 결과적으로 원작 만화의 역사를 계승한 마블 유니버스가 탄생했다. 관객들은 영화가 시작될 때마다 마블 스튜디오의 로고 영상을 만났다. 만화책 책장을 넘기며 역사적인 캐릭터들이 현실 세계로 튀어나오는 장면이었다. 눈썰미 좋은 팬들은 80대인 스탠 리의 카메오 출연을 즐겼다. 또한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다른 영화에 등장하는 모습에 열광했다.
마블은 수십 년 전 만화책에서 썼던 방식을 영화에 도입했다. 특정 시리즈에서 조연으로 신규 캐릭터를 소개한 뒤 인기를 얻으면 단독 영화로 독립시키는 방식이었다. 성공하면 다시 팀 프로젝트에 합류시켰다. 이러한 섞기과 맞추기를 통해 마블은 무한에 가까운 이야기와 캐릭터 조합을 만들어 냈다. 설령 작품 하나가 실패하더라도 해당 캐릭터를 다시 무리 속에 섞어두고 다른 후보로 대체하면 그만이었다.
마블은 만화책이라는 한정된 제품에 매달리지 않았다. 대신 고객 및 제품 다각화를 밀어붙여 이 모든 것을 이뤄냈다. 마블은 영화 제작에 사활을 걸었다. 변화하는 시장 맥락에 맞춰 제품군을 획기적으로 바꿨다. 인쇄물 비중을 줄이고 영화 비중을 높였다. 유명 캐릭터와 비주류 캐릭터, 팀 프로젝트를 정교하게 섞어 제품 조합을 전면 재편했다. 또한 지난 10년 동안 이들의 등장과 상호작용의 실행 순서를 치밀하게 설계했다.
마블은 화려하게 돌아왔다. 2009년 8월, 월트 디즈니 컴퍼니가 마블 엔터테인먼트를 40억 달러가 넘는 금액으로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파산 선고 11년 만의 일이었다. 죽음의 문턱에 섰던 2000년으로부터는 불과 9년 만에 마블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기업 중 하나가 되었다. 투자자들에게 막대한 수익을 돌려주었음은 물론, 기존 팬들을 만족시키고 수많은 신규 고객까지 사로잡았다. 2017년 12월 디즈니의 폭스 인수는 마블 유니버스의 확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 인수는 할리우드와 실리콘밸리의 지형을 다시 그리고 있다.
마블 : 핵심 인사이트
마블이 마블 마니아 레스토랑이나 CD-ROM, 스카이박스와의 새로운 트레이딩 카드 사업처럼 실패로 끝난 여러 시도 이후 고객 및 제품 다각화를 포기했다면 지금의 마블은 없었을 것이다. 이 경로에서 실패는 학습 과정의 일부다. 그래서 기업 문화가 중요하다. 성장을 자극할 새로운 길을 찾는 과정에서 고난을 견뎌낼 내부적 강인함이 없다면 가시밭길을 걷게 될 것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혁신의 기회를 놓칠 수 있다.
20세기 폭스나 소니와의 파트너십은 당시에는 최선의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수익 모델 측면에서 마블이 계속 고집할 길은 아니었다. 이런 계약을 맺을 때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지는 파트너십 경로에 대한 장에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마블의 경우, 고객 및 제품 다각화는 기존 자산(캐릭터)을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로 확장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덕분에 마블의 본질인 스토리텔링을 유지하면서 충성 고객층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고객이 왜 당신의 브랜드를 좋아하고 지갑을 여는지 정확히 파악하라. 어떤 일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지 결정할 때 이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에 따른 위험은 온전히 당신의 몫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