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성장 04] 블록버스터 vs 넷플릭스, 무분별한 확장이 부른 몰락
“휴스턴, 문제가 생겼다.”
— 잭 스위거트Jack Swigert, 아폴로 13호 사령선 조종사
블록버스터가 한때 비디오 대여 시장을 지배했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1985년 댈러스에서 문을 연 블록버스터는 9년 만에 바이아컴에 84억 달러라는 거액에 인수됐다. 지금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지만 10년 전만 해도 밝은 조명의 블록버스터 매장은 미국인의 주말 풍경 그 자체였다. 매주 금요일이면 수천만 명의 사람이 최신 비디오를 빌리기 위해 매장으로 몰려들었다. 주요 영화 제작사들의 전폭적 지원과 검증된 수익 모델을 갖춘 블록버스터는 사실상 ‘돈을 찍어내는 면허’를 가진 거대 기업이었다.
하지만 1987년부터 1997년까지 이어진 급격한 성장과 공격적 확장, 무리한 인수합병은 결국 독이 되었다. 블록버스터는 심각한 성장 정체에 빠졌다.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블록버스터는 도미노 피자, 맥도날드와 공동 프로모션 파트너십을 맺었다. 광고 캠페인을 퍼부었고 해외로 눈을 돌려 시장 확장 가속화를 밀어붙였다. 일부 매장에서는 비디오 게임기나 세가 제네시스 게임을 팔기 시작했다. 오디오 카세트와 CD 판매까지 검토했다. 심지어 1992년 올림픽 경기 테이프의 마케팅 권리를 확보하는 등 고객 및 제품 다각화에 온 힘을 다했다. 1990년 6월, 미국 내 블록버스터 매장은 1,200개를 넘어섰다. 하루에 하나꼴로 새 매장이 문을 열 정도였다.
블록버스터는 동시에 수많은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디오 대여 산업 자체의 둔화 조짐은 너무나 뚜렷했다. 1988년 114퍼센트라는 경이적인 수익 성장률을 기록했던 블록버스터는 1989년 93퍼센트, 1990년 48퍼센트로 성장세가 꺾였다. 1991년 1분기 실적은 결국 실망스러운 수준에 머물렀다.
당시에도 블록버스터는 미국 전역에서 가족들이 선택하는 사실상 유일한 대여점이자 시장 선도 기업이었다. 블록버스터는 강력한 브랜드 파워와 엄청난 수의 비디오테이프를 앞세웠다. 이를 통해 신규 고객을 쉽고 지속적으로 끌어 모았다. 하지만 이는 고객에게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로열티 카드를 출시하는 것과 고객의 진심 어린 충성도를 얻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미국과 전 세계 24개국 9,100개 매장에서 하루 300만 명의 고객을 상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스타벅스에 물어봐도 같은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블록버스터가 대여 빈도를 높이기 위해 고객 경험 경로로 방향을 틀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외부 시선으로 볼 때(그리고 고객 입장에서 볼 때) 그런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블록버스터에서 비디오를 빌리는 과정은 고역에 가까웠다. 인기 있는 최신작은 늘 재고가 부족했다. 고객은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듯 통로를 끝없이 헤매야 했다. 어렵사리 영화를 찾아도 케이스 안의 내용물이 맞는지, 테이프가 제대로 되감겨 있는지 일일이 확인해야 했다. 그렇게 빌린 비디오를 2~3일 뒤에는 번거롭게 매장까지 가서 반납해야 했다. 연체되는 일도 허다했다. 때로는 대여비보다 비싼 과도한 연체료 때문에 고객들의 분노가 폭발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 터무니없는 연체료가 고객들이 블록버스터에 등을 돌리고 대안을 찾게 만든 결정적인 기폭제였을 것이다.
연체료 없는 비디오 서비스의 등장
블록버스터가 시장을 평정하고 수많은 가정에 즐거움을 선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블록버스터는 곧 회사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꿔 놓을 거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무엇보다 블록버스터는 시장의 맥락이 변하는 속도를 전혀 따라잡지 못했다. 인터넷이 각 가정으로 빠르게 보급되면서 소비자들의 취향도 함께 변했다. 이는 새로운 경쟁 세력이 등장할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이끈 주인공은 실리콘밸리의 한 스타트업이었다. 1997년, 리드 헤이스팅스Reed Hastings는 동네 블록버스터 매장에 영화 〈아폴로 13〉을 늦게 반납했다. 그 결과 40달러의 연체료를 물게 되었다. 이 일에 분노한 그는 연체료를 내지 않아도 되는 서비스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1년 뒤 넷플릭스를 설립했다. 넷플릭스의 시작은 미미했다. 하지만 넷플릭스는 닷컴 붐의 선두 주자로서 인터넷 기술을 활용했다. 혁신적 비즈니스 모델과 제품을 앞세워 블록버스터의 고객층을 공략하며 시장을 뒤집기 시작했다.
“레드박스나 넷플릭스는 우리와 경쟁 자체가 불가능하다.”
— 짐 키스, 블록버스터 전 CEO
넷플릭스는 블록버스터가 가장 취약한 지점을 파고들었다. 비디오를 빌리고 반납하는 과정을 더 간편하게 만들어 블록버스터 이용 고객이 느끼던 번거로움을 제거했다. 특히 블록버스터의 핵심 수익원이었던 연체료를 없애버린 것이 결정적이었다.
또한 넷플릭스는 아주 초기부터 사용자 선호도와 과거 대여 이력, (현재의 아마존처럼) 위시리스트 데이터를 분석해 영화를 추천하기 시작했다. 이는 두 번째 성장 경로인 고객 기반 확대 경로를 완벽하게 활용한 사례다. 그들은 우편 서비스를 통한 영화 대여 서비스라는 본질에 집중하면서 고객이 더 자주, 더 많이 지출하게 만드는 방법을 찾아내 초기부터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는 그 부분에 대해 전혀 우려하지 않는다. 넷플릭스는 집에서 다양한 영화를 즐길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회사다. 하지만 넷플릭스는 본질적으로 텔레비전 네트워크에 가깝다. 넷플릭스의 방식은 HBO나 쇼타임이 수년 동안 해온 방식과 비슷하다. 자체 제작 콘텐츠를 갖추고 있지만 그 콘텐츠는 극장이 아니라 TV에서 상영된다. 넷플릭스가 크게 성공하길 바란다. 우리는 넷플릭스가 영화관을 위협할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는 그 가능성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
— 마크 조라디, 시네마크 CEO
넷플릭스가 세력을 넓히는 동안 블록버스터는 기술과 소비자 취향의 변화를 외면했다. 넷플릭스가 설립된 지 5년이나 지난 2004년에야 블록버스터는 온라인 DVD 대여 시장에 뒤늦게 발을 들였다. 2006년 11월에는 넷플릭스의 안마당을 겨냥해 토털 액세스 DVD를 출시했다. 이를 통해 제품 라인업 확장을 시도한 것이다. 온라인으로 영화를 빌려 우편으로 받은 뒤 오프라인 매장에 반납하면 무료 대여 쿠폰을 주는 방식이었지만 너무 늦은 대응이었다. 2007년 블록버스터의 온라인 가입자가 200만 명에 머물 때, 넷플릭스는 이미 630만 명을 돌파하며 멀찌감치 앞서나갔다.
블록버스터는 몰락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과거의 여러 인수와 제휴 사례를 보면 블록버스터에게도 제품군을 확장하려는 의지와 열망은 분명히 있었다. 2000년에는 엔론Enron과 손잡고 주문형 비디오VOD 서비스를 구축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원래 20년간 지속될 계획이었던 파트너십은 불과 몇 달 만에 끝났다. 엔론은 블록버스터가 서비스에 필요한 영화 콘텐츠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할 것이라 우려해 파트너십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블록버스터는 넷플릭스보다 훨씬 많은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거의 활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실제로 블록버스터 뮤직, 블록버스터 블록 파티, 토털 액세스 DVD 대여 서비스 등 화려한 제품 라인업 확장을 시도하고도 몰락의 길을 걸었다. 게다가 블록버스터는 결정적 기회를 스스로 발로 찼다. 2000년 당시 신생 기업이던 넷플릭스를 단돈 5천만 달러에 인수할 수 있는 제안을 거절한 것이다.
블록버스터는 변화를 두려워하며 과거에 너무 오래 매달렸다. 그사이 시장 맥락과 고객은 블록버스터가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변했다. 넷플릭스는 블록버스터의 고객을 흡수하며 무섭게 세력을 확장했다. 넷플릭스가 시장에서 트랙션을 확보하며 승승장구할수록 블록버스터가 느끼는 압박은 극에 달했다.
이 시점에서 넷플릭스가 내린 결정의 실행 순서가 매우 결정적이었다. 만약 넷플릭스가 DVD 우편 대여 서비스를 건너뛰고 곧장 스트리밍 서비스로 직행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닷컴 버블 붕괴 때 사라진 수많은 기업과 같은 운명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넷플릭스는 이미 검증된 시장인 DVD 대여 분야에서 고객을 선점했다. 참고로 넷플릭스는 현재도 이 분야에서 400만 명 이상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다. 또한 이 비즈니스에서 압도적인 운영 효율성을 달성해 막대한 수익을 창출했다.
블록버스터를 안방에서 몰아내고 승리한 넷플릭스는 이제 훨씬 더 강력한 적들과 마주하고 있다. 특히 2017년 524억 달러를 들여 폭스를 인수한 디즈니 같은 콘텐츠 공룡들이 위협적이다. 디즈니의 CEO 로버트 A. 아이거Robert A. Iger는 넷플릭스, 애플, 아마존, 페이스북과 경쟁하기 위해 회사의 모든 역량을 스트리밍 서비스로 집중시키고 있다..
블록버스터 vs 넷플릭스 : 핵심 인사이트
블록버스터는 처음부터 제품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제품이 고객에게 어떤 가치를 주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고객이 매장에서 빌려가는 비디오 자체가 제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화 제작사의 결과물을 쌓아둘 방대한 재고와 거대한 유통망을 구축하는 데만 집착했다. 블록버스터는 고객이 구매하는 진짜 가치가 무엇인지 놓쳤다. 그것은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영화를 즐기는 경험이었다. 결국 고객이 제품을 얻는 방식인 유통 채널이 바뀌기 시작하자 블록버스터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블록버스터는 성공에 취해 안주했다. 비디오 대여 시장의 오랜 선두 주자라는 위치가 오히려 독이 되었다. 이로 인해 시장 환경의 급격한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결국 넷플릭스가 미래 비즈니스에 끼칠 위협도 예측하지 못했다.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되자 고객들은 달라졌다. 기술을 통해 더 쉽고 효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길 원했다. 그 결과 모든 기업이 가치 제안과 시장 진출 방식을 재검토해야 했다. 이제 가장 강력한 적은 시장 내 경쟁사가 아닐 수도 있었다. 오히려 운영비가 낮고 인터넷 생태계를 정확히 이해하는 가상 매체가 더 위협적이었다.
블록버스터는 온라인 시장 진입도 늦었지만 자신만의 강점도 살리지 못했다. 블록버스터는 방대한 고객층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넷플릭스가 가질 수 없는 압도적 우위를 내세웠어야 했다. 바로 온라인 대여, 매장 반납 전략이다. 이를 통해 시장을 휩쓸어야 했지만 블록버스터는 넷플릭스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는 데 그쳤다. 그사이 넷플릭스는 더 저렴하고 효율적인 서비스로 블록버스터의 고객층을 야금야금 파고들고 있었다.
여러 성장 경로를 동시에 추진하려면 실행 순서를 깊이 고민해야 한다. 블록버스터는 성장이 정체되자 방향을 수정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성장 경로를 한꺼번에 조합한 것이 문제였다. 결국 블록버스터는 여러 경로에 얽매여 끌려 다녔다. 어느 한 경로에도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 채 무너지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