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스트, 애플을 구한 빈칸
새 공장을 둘러보고 넥스트 팀원들과 함께 임대한 스쿨버스로 돌아오는 스티브 잡스. 캘리포니아주 프리몬트, 1987년.
때로는 내기에서 진 것이 뜻밖의 행운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버펄로의 어느 바에서 술을 잔뜩 마신 채 당구를 치다가, 나는 마지막 8번 공을 넣으려다 그만 흰 공까지 빠뜨리고 말았다. 본전을 되찾겠다며 판돈을 두 배로 올렸지만 결과는 또 한 번의 패배였다. 빈털터리가 된 데다 달리 방법도 없던 내게 떨어진 벌칙은 승자의 배불뚝이 난로를 싣고 실리콘밸리까지 운전해 가는 일이었다. 1976년 여름, 대학을 갓 졸업한 때였다. 그리고 나는 두 번 다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나는 실리콘밸리에서 첫 직장을 잡아 소니의 업무용 녹음 장비를 파는 일을 시작했다. 바로 그 주에 애플은 스티브 부모님 집 차고를 벗어나 처음으로 사무실을 임대했는데, 공교롭게도 소니 사무실 바로 옆 건물이었다.
각자의 사무실 앞에 서 있다가, 스티브와 나는 자연스레 대화를 트게 되었다. 1977년 4월 7일의 일이다. 그 시절 그는 머리가 제법 길고 기름졌으며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버켄스탁 샌들에 구멍 난 청바지 차림이었고, 한눈에 봐도 샤워가 필요해 보였다.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소니의 제품과 브랜드에 호기심을 보였고, 나는 그에게 제품 브로슈어를 건넸다. 그가 브로슈어를 넘기다가 왜 우리 제품이 경쟁사보다 비싼지 물었다.
내가 대답했다. “소니니까요.”
그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경쾌한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가 자리를 뜨면서 브로슈어를 손가락으로 비벼 종이의 질을 가늠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소한 행동 하나가, 세월이 흐르며 내가 점점 높이 사게 된 그의 한 가지 기질을 알려 주었다. 바로 집중력이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그는 주변의 모든 것을 걷어 내고 오직 상대만을 바라보는 특유의 방식이 있었다. 사업상의 문제와 마주했을 때도 그는 군더더기를 쳐 내고 문제를 그 본질까지 깎아 내릴 줄 알았다. 그리고 로고나 종이의 질 같은 디자인 문제에 관해서라면, 그는 언제나 까다로운 비평가였다.
후에 애플과 넥스트에서 함께 일하면서 나는 그와 전 세계를 다녔다. 어디를 가든 스티브의 집중력은 놀라웠다. 다른 도시의 거리를 걸을 때면, 그는 차를 보고는 그 디자인의 어떤 점을 내게 짚어주곤 했다. 펜더의 곡선이 드리우는 그림자, 헤드램프의 형태, 심지어 특정 모델에 가장 어울리는 색상까지. 그는 모든 사물에서 디자인적 통찰을 흡수하는 사람이었고, 늘 탁월함을 추구했다.
그의 집중력은 내가 함께 일해본 그 누구와도 그를 다르게 만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초능력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강점이 그렇듯, 그 집중력은 양날의 검이기도 했다. 때로 그는 자신의 집중력에 스스로 발목을 잡히곤 했다. NeXT 시절에는 그 집중력 탓에 엉뚱한 일들에 광적으로 매달렸고, 회사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완벽을 향해 무섭게 내달렸다.
그래서 그의 밑에서 일하기란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까다로운, 게다가 수시로 바뀌는 잣대에서 누구도 예외로 두는 법을 몰랐다. 상대가 식당 종업원이든, 회사의 최고위 임원이든, 대학 총장이든 마찬가지였다. 그는 타인에게 너그러움을 베푸는 일에 서툴렀다.
첫 만남 이후 몇 년간, 애플이 성장하면서 스티브와 나는 때때로 마주쳤다. 이야기는 언제나 소니 제품에 관한 것이었다. 그 브랜드와 기술을 향한 그의 호기심은 한결같았다.
1980년 12월, 소니가 3.5인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발표한 날, 스티브는 나를 애플에 영입했다. 그즈음 나는 소니의 영업사원으로서 실리콘밸리의 거의 모든 회사를 돌아본 뒤였으며, 기업공개(IPO)로 입증된 애플의 폭발적 성공만큼이나 애플이라는 문화 속에 몸담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개인용 컴퓨터라는 새로운 산업의 역학에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빠르게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내가 스티브에게 그래픽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자, 그는 애플이 사람과 컴퓨터가 상호작용하는 ‘더 나은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고 넌지시 알려주었다. 나는 마이크로프로세서와 반도체 산업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연봉을 낮추면서까지 입사했다. 그렇게 10년에 걸친 동료 관계와 우정이 시작되었고, 그것은 내 인생의 항로를 바꾸어놓았다.
애플에서 나는 리사(Lisa) 컴퓨터를 개발하던 개인 사무 시스템 사업부의 시장 개발 매니저로 시작하여, 끝내는 애플의 교육 마케팅 부서를 설립하게 되었다. 나는 스티브가 이끌던 초기 매킨토시 사업부에서 몇 년을 근무하며 애플 유니버시티 컨소시엄과 ‘마음을 위한 바퀴’ 이니셔티브의 브랜딩을 담당했다. 이 컨소시엄은 1984년 늦여름, 단 한 달 만에 약 5만 대의 매킨토시를 학생들의 손에 쥐어주었으며, 이를 통해 애플은 고등교육 시장의 주요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교육 사업은 애플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는데, 1985년까지 애플 전체 매출의 3분의 2를 차지할 만큼 성장했다. 또한 이 사업은 개인용 컴퓨터 제조사가 고객에게 직접 판매하는 방식을 선구적으로 개척한 사례이기도 했다.
1985년 초, 스티브는 애플에서 쫓겨났다. 그해 말 그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저는 고등교육에 초점을 맞춘 새 회사를 만들 겁니다.” 그가 말했다. “저와 함께해줬으면 합니다.”
그날 나는 우드사이드에 있는 스티브의 집에서 그를 만나 산책에 나섰다. 산책은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을 때 그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나중에 넥스트가 될 회사의 비전을 내게 설명했다. 애플에서 함께한 작업을 기반으로 고등교육 기관을 위한 강력한 컴퓨터를 개발하고 싶다고 했다. 내가 애플에서 쌓은 인맥과 시장 전문 지식이 이 사업에 필수적이라고 했다.
스티브의 새 회사에 합류하겠다는 결정은 서류상으로는 꼭 합리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애플에서 교육 마케팅을 이끄는 좋은 자리에 있었다. 스타트업을 세우는 것은 분명한 모험이었다. 성공이 보장되지 않았고, 스티브는 아직 전설적인 명성을 얻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내가 합류하지 않았는데 그 회사가 성공한다면, 나로서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는 셈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나 없이 실패한다면, 내가 있었다면 달라졌을까 하는 의문을 평생 품게 될 터였다. 결국 나는 합류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며칠 안에 다섯 명의 공동 창업자와 나는 애플을 떠나, 가구도 거의 없는 스티브의 집에서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회사를 시작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신념으로 뭉쳤지만, 실질적인 계획은 없었다. 서로밖에 없었고, 각자의 기술과 축적된 경험, 그리고 스티브의 개인 은행 계좌에 있는 약간의 종잣돈이 전부였다.
참으로 짜릿한 시기였다.
스티브에 관해, 그리고 애플에 관해 수많은 책과 영화가 만들어졌지만, 대부분은 스티브 인생의 이 시기와 넥스트의 진짜 이야기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으며, 대개는 대충 훑고 지나가거나 미화했다.
우리가 넥스트에서 자주 이야기했듯이, 회사를 키우는 것은 텀블러 안에서 돌을 연마하는 것과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거친 혼합물이 반짝이고 잘 맞물려 돌아가는 팀으로 변모한다. 그러나 그 과정이 늘 매끄럽지만은 않다. 서로 부딪히고, 부침을 겪는다. 기존의 서사들은 넥스트 시절의 고된 경험과 시행착오를 간과함으로써, 스티브의 리더십 발전과 그 궁극적 결과 모두에 영향을 끼친 이 중요한 시기를 의미 있게 다루지 못했다. 이때 만들어진 넥스트의 핵심 기술은 1990년대 후반 애플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아마도 이 부분을 건너뛰려는 충동의 일부는, 뒤에 설명되겠지만, 넥스트가 사업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넥스트는 성공할 모든 재료를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 있었고, 세계적 수준의 팀을 보유했으며, 업계의 다른 누구보다 몇 년은 앞선 기술을 구축하고 있었다. 역사가 달리 흘러갔더라면, 그리고 스티브가 좀 더 기꺼이 조언을 받아들였더라면, 넥스트와 그 운영체제 넥스트스텝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가 결국 차지한 자리를 대신해 업계 표준이 될 수 있었다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그 대신 우리는 끊임없는 난관에 직면했다. 우리가 만든 컴퓨터는 가격이 비쌌고, 시장 출시는 늦었으며, 출시된 뒤에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한편 스티브는 중요한 거래처 및 유통 파트너와의 관계를 본인 손으로 망가뜨렸다. 넥스트는 늘 파산 직전에 있었고, 끊임없이 변하는 스티브의 기준에 휘둘렸다. 나를 포함한 초기 팀원 다수가 그에 대한 좌절감으로 회사를 떠났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넥스트는 이후 애플과 기술 산업 전반에 걸쳐 일어난 모든 일의 보이지 않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 책은 그러한 성취가 어떻게 모습을 갖추어 갔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동시에 스티브가 어떻게 변화하고 성장했는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그의 성장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으며, 우리의 협업을 통해 나 자신의 성장도 경험했다. 그것은 우리 사이의 능동적인 밀고 당기기였다. 애플에서 나는, 우리의 업무 관계가 성공하려면 그를 동등하게, 명확하고 직접적이며 단호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스티브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넥스트를 시작했을 때, 스티브는 자신의 대중적 존재감을 키우는 데 에너지를 쏟고 싶어 했다. 나는 그에게 그런 방식은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팔 수 있는 제품이 나오기 전까지는 스티브 자신이 곧 제품이었기에, 우리는 그를 어떻게 내세울지 신중해야 했다. 나는 스티브의 페르소나를 가장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은 그에게 신비로운 분위기를 부여하는 것이라 믿었으며, 그것은 그가 늘 나서서 말하고 다녀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스티브에게 낯선 개념이었다.
어느 날, 우리의 첫 사무실을 임대했던 스탠퍼드 리서치 파크 언덕에서 산책하며 이 주제를 논의하던 중, 나는 그가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쉽게 꺼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스티브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무엇이 마음에 걸리는지 말해보라고 내가 재촉하자,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가끔, 당신이 내 자리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즉시 대답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당신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입니다.” 나는 말했다.
나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대학 시절, 나의 독립 연구와 졸업 논문은 카리스마적 리더십 이론을 다루었다. 당시 막 비준된 수정헌법 제26조가 투표권을 열여덟 살까지 확대한 일이 내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밥 딜런은 물론, 흑인 민권 운동과 여성 인권 운동을 이끈 거인들이 사람들을 어떻게 조직하고 이끌었는지 파고들게 되었다. 그들이 부린 마법, 그 이면의 방법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들은 어떻게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면서도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늘려 갔을까? 그 과정에서 내가 발견한 한 가지는 이것이다. 세상을 바꾼 리더들은 언제나 자신의 출발점이 된 이야기, 혹은 핵심이 되는 단 하나의 개념으로 거듭 되돌아간다는 사실이었다.
스티브에게 그 핵심은 매킨토시였다.
1984년에 출시된 매킨토시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로 컴퓨터 산업에 혁명을 일으켰다. 그 이전에 사용자들은 마우스가 아니라, 컴퓨터가 실행할 명령어를 직접 타이핑해야 하는 커맨드라인 인터페이스를 통해 컴퓨터와 상호작용해야 했다. 매킨토시는 개인용 컴퓨팅을, 출시 당시의 광고 문구 그대로 ‘나머지 우리 모두를 위한(for the rest of us)’ 것으로 만들어 누구나 다가갈 수 있게 했다.
당시로서는 불가능해 보였지만, 넥스트는 스티브가 매킨토시로 돌아가 카리스마적 리더로 부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매킨토시는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제품군은 매력 없는 선택지만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고, 운영체제는 한참 뒤처진 상태였으며, 애플은 회사 자체가 파산 직전이었다. 1997년 애플로 돌아온 스티브는 유능한 팀과 함께 넥스트의 기술을 매킨토시에 녹여 냈고, 그렇게 매킨토시를 다시 선두의 자리로 끌어올렸다.
넥스트가 있었기에 매킨토시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넥스트가 있었기에 스티브는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영원히 새길 수 있었다.
1990년 넥스트를 떠난 후, 나는 바깥에서 스티브가 애플의 놀라운 변신을 이끌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편 넥스트에서의 경험과 스티브와의 관계는 내 평생 모든 일의 근본적인 토대로 남아 있었다. 이는 내가 마이크로소프트에 입사하여, 스티브의 라이벌인 빌 게이츠가 애플 및 컴퓨터 산업 전반과의 사업 관계를 정상화하도록 돕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마이크로소프트는 오랫동안 이어져 온 반독점 소송을 마무리 짓는 과정에 있었다.
나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거의 17년을 보냈다. 이후 2018년부터 2025년까지 컴퓨터 역사 박물관의 운영을 맡아 이끈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컴퓨팅의 역사에 대한 우리의 공동의 이해를 발전시키고, 그것이 인간의 삶과 사회 전반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탐구하는 데 헌신했다.
나는 넥스트가 그 이야기의 주요한 부분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내가 넥스트 재직 시절 수집한 이 책의 원천 자료들을 공유하기로 결심한 이유다. 그 자료들이 제프리 케인의 유능한 손에서 생명을 얻게 되어 매우 기쁘다.
넥스트의 일원이었던 것은 영광이었으며, 우리의 시련과 고난에 관한 이 이야기를 읽으며 독자 여러분도 가치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마치 나와, 넥스트를 거쳐간 직원들이 그것을 직접 겪으며 얻었던 것처럼.
제프리에게 넘기기 전에, 모든 기술 이야기에서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 한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가족이다. 회사라는 가족이 아니라, 창업자와 건설자들이 위대한 일을 해나갈 때 그들을 지탱해주는 아내, 남편, 자녀, 파트너, 부모, 그리고 스스로 선택한 가족 구성원들 말이다.
나 역시 내 가족이 없었더라면 이 서문을 쓰고 있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스티브 역시 그의 가족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아는 그 사람이 되지 못했으리라 확신한다.
넥스트를 처음 설립했을 때, 스티브에게는 가족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그것이 때때로 스티브와 나 사이에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내게는 아내와 어린 아들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스티브가 그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휴일이든 가족 생일이든 가리지 않고 경영진이 주말 회의에 직접 참석할 것을 종종 요구했고, 나는 최선을 다해 선을 그으려 했다.
내가 회사를 떠난 후, 스티브는 그 이유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후기 넥스트 시절, 그는 결혼했고, 둘째와 셋째, 넷째 아이를 낳았으며,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웠다. 같은 시기에 그의 양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1993년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 상실은 스티브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그는 나를 장례식에 초대했다. 참석자는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얼마 후 우리는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늘 그랬듯 스티브는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평소와 다른 첫마디를 꺼냈다.
“당신이 옳았어요.” 그가 예전 그대로의 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엇이요?” 나는 넥스트를 함께 세우며 보낸 수년간의 논쟁과 고군분투를 떠올리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가족이요.” 그가 말했다.
그날 아침 우리는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품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었지만, 오직 가족만이 줄 수 있는 인생의 교훈에 대해 큰 열정으로 대화했다. 스티브의 성공과, 궁극적인 애플의 성공은 이러한 균형, 그리고 그가 가족으로부터 배운 타인에 대한 헌신과 신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이는 우리 모두가 귀 기울여야 할 교훈이다.
대니얼 레윈
컴퓨터 역사 박물관 전 CEO
넥스트 컴퓨터 공동 창업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