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베로나 북부, 알프스의 차가운 공기가 내려앉는 페드리고니Fedrigoni의 제지 공장 내부는 역설적이게도 뜨거운 증기와 굉음으로 가득하다. 135년의 역사를 지닌 이곳에서 종이를 만드는 공정은 과학이라기보다 차라리 '연금술'에 가까웠다. 펄프가 물에 풀어져 거대한 와이어를 타고 흐르고, 수십 개의 고온 롤러를 통과하며 건조되어 마침내 매끄러운 특수지로 탄생하는 과정은 수천 가지 변수가 찰나의 순간에 상호작용하는 복잡계 그 자체다.
이 복잡계를 지배하는 것은 최첨단 센서가 아니었다. 30년 넘게 기계와 함께 늙어온 공장장, 소위 '마에스트로(장인)'들의 감각이었다. 그들은 기계가 내는 웅웅거리는 소리의 미세한 변화만으로 롤러의 베어링이 마모되었음을 감지했고, 갓 나온 종이를 손끝으로 스치듯 만져보는 것만으로 수분 함량이 0.1% 부족함을 알아챘다. "오늘따라 기계가 좀 뻑뻑하게 도는군. 스팀 압력을 조금 낮춰야겠어."라는 그들의 한마디는 수백 페이지의 매뉴얼보다 정확했다. 이것이 바로 '암묵지Tacit Knowledge'다. 말로 설명할 수 없고, 글로 쓸 수도 없으며, 오직 오랜 경험을 통해 체화된, 한 개인의 신체에 귀속된 지식이다. 그러나 이 위대한 유산은 동시에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다. 장인이 은퇴하는 순간, 기업의 핵심 경쟁력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인구구조의 변화와 글로벌 경쟁의 격화 속에서 '대체 불가능한 인간의 감感'을 어떻게 디지털 자산으로 전환하고 영속시킬 수 있을까? 이것은 비단 페드리고니만의 문제가 아니라, 소위 ‘굴뚝 산업’이라 불리는 전 세계 제조업이 직면한 보편적인 위기다.
"‘오늘따라 기계가 좀 뻑뻑하게 도는군. 스팀 압력을 조금 낮춰야겠어.’라는 그들의 한마디는 수백 페이지의 매뉴얼보다 정확했다. 이것이 바로 ‘암묵지’다. 그러나 이 위대한 유산은 동시에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다."
데이터는 넘쳐나지만 그 데이터가 서로 대화하지 못하는 ‘사일로 현상, 그리고 물리적 설비와 디지털 시스템이 따로 노는 현실은 생산성의 한계를 규정짓고 있다. 그러나 페드리고니는 기존의 낡은 설비를 전면 교체하는 대신, 그 위에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신경망을 덧입히는 방식을 택했다. 팔란티어의 파운드리를 도입하여 물리적 공장을 디지털 세계에 복제하고, 파편화된 데이터에 ‘질서’를 부여한 것이다. 이 챕터에서는 페드리고니가 어떻게 ‘장인의 감’을 ‘알고리즘의 언어’로 번역하여 환골탈태했는지, 그리고 파나소닉Panasonic이 배터리 생태계에서 이를 어떻게 확장했는지를 분석해 한국 제조업이 나아가야 할 ‘소프트웨어 중심 제조’의 청사진을 제시하고자 한다.
장인의 '손끝'을 알고리즘의 '코드'로 번역하는 도전
제조업 현장에서 가장 흔한 비효율은 시스템 간의 단절에서 온다. 보통 기업의 자원을 관리하는 전사적 자원 관리 시스템은 재무와 인사 부서의 언어로 작성되고, 공정의 실행을 담당하는 제조실행시스템은 엔지니어의 언어로, 창고를 관리하는 창고관리시스템은 물류 담당자의 언어로 각각 운영된다. 페드리고니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경영진이 ‘생산 비용 절감’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수립하더라도, 이 지시가 실제 공장 라인의 기계 세팅 값 변경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수많은 해석과 보고 과정을 거쳐야 했다. 각 시스템이 서로 다른 데이터 포맷과 프로토콜을 사용하는 ‘바벨탑’의 상황에서 데이터는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었다. 더욱이 제지 산업 특유의 비정형성(펄프의 미세한 품질 차이나 기온과 습도에 따른 건조 속도의 변화)은 기존의 경직된 IT 시스템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레거시 시스템을 모두 들어내고 새로운 단일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막대한 비용과 리스크를 수반하는 사실상 불가능한 프로젝트였다.
이런 실존적 위기 앞에서 페드리고니는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2025년 6월, 팔란티어와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발표하며 ‘교체’가 아닌 ‘포용’ 방식을 통한 디지털 전환을 선언한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팔란티어의 파운드리를 통해 기존에 존재하던 전사적 자원 관리 시스템, 제조 실행 시스템, 창고 관리 시스템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대신, 이들 시스템 위에 ‘온톨로지’라는 가상의 층Layer을 덮어씌우는 것이다. 온톨로지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시스템들 사이에서 실시간 통역사 역할을 수행하며, 파편화된 데이터들을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한다. 예를 들어 전사적 자원 관리 시스템 상의 ‘원가 데이터’와 제조 실행 시스템 상의 ‘기계 가동률 데이터’, 창고 관리 시스템 상의 ‘펄프 재고 데이터’가 온톨로지 안에서는 ‘수익성 최적화’라는 하나의 객체로 결합하는 식이다. 이를 통해 경영진은 데이터가 의사결정의 근거가 되고 그 결과가 다시 시스템에 피드백되는 ‘행동하는 지성’의 구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페드리고니의 생산 현장을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것을 목표로 한다.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완료되면, 과거 수십 년 경력의 장인이 종이 반죽의 점도를 눈대중으로 확인하고 경험에 의존해 물의 양을 조절하던 영역을 디지털 트윈이 보조하거나 대체하기 시작할 것이다. 파운드리는 수만 개의 센서에서 수집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하여, 현재의 날씨와 원료 상태에서 최상의 종이를 만들 수 있는 배합 비율을 작업자에게 제안한다. 이는 장인의 암묵지가 데이터라는 ‘형식지Explicit Knowledge’로 변환되어 시스템에 내재화되는 과정이다.
페드리고니의 혁신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들은 불량률을 획기적으로 낮추고 생산 일정을 유연하게 조정하는 것을 목표로, 135년 된 낡은 공장이 AI라는 두뇌를 장착한 최첨단 스마트 팩토리로 거듭나는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페드리고니의 도전은 제조업의 혁신이 하드웨어의 교체가 아닌, 데이터를 다루는 방식 즉 ‘소프트웨어적 접근’의 전환에서 비롯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파나소닉의 배터리 혁신 Case : ‘수율 전쟁’과 데이터의 승리
제조업의 디지털 혁신은 단일 공장의 효율화를 넘어 산업 생태계 전체로 확장된다. 이 지점에서 파나소닉 에너지 북미법인PENA의 사례는 스마트 팩토리의 고도화된 모델을 보여준다. 미국 네바다주 사막 한가운데 자리 잡은 ‘기가팩토리Gigafactory’는 단순한 공장이 아니라, 24시간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거대한 정밀 기계들의 오케스트라다. 이곳에서 매일 수백만 개의 전기차 리튬이온 배터리가 생산된다.
파나소닉의 핵심 과제는 극도의 정밀함을 요구하는 배터리 셀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변수를 통제하고 수율(양품 비율)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전극을 섞고, 바르고, 자르고, 마는 일련의 과정에서 머리카락 굵기보다 작은 오차나 미세한 습도 변화만 있어도 배터리는 ‘불량’ 판정을 받는다. 문제는 이 불량이 즉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제조된 배터리는 며칠 혹은 몇 주간의 숙성Aging 과정을 거친 뒤 최종 검사 단계에서야 비로소 전압 불량이 발견되곤 했다.
기가팩토리 전경
이 ‘시간차’는 엔지니어들에게 악몽과도 같았다. 파나소닉 에너지 북미법의의 최고 정보 책임자CIO 저스틴 허먼이 AIP 컨퍼런스에서 고백했듯, 공장 내에는 수천 개의 센서가 있었지만 데이터는 전사적 자원 관리 시스템, 제조 실행 시스템, 레거시 시스템 등 각기 다른 '사일로'에 갇혀 있었다. IT와 공장 운영 기술이 따로 놀다 보니, 엔지니어들은 엑셀 파일을 수동으로 맞추거나 종이 매뉴얼을 뒤지느라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최종 단계에서 발견된 불량 배터리 더미 앞에서 원인을 찾으려 해도, 며칠 전의 공정 데이터를 뒤져 파편화된 데이터 속에서 인과관계를 찾는 것은 '미로 찾기'나 다름없었다. 그 사이 라인은 멈춰 서고 막대한 재료는 폐기물이 되었다.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나소닉은 팔란티어 파운드리를 도입하여 '산업용 데이터 패브릭Industrial Data Fabric'을 구축했다. 이는 공장 내 흩어져 있던 수십억 개의 데이터 포인트(센서, 공정, 품질 데이터)를 하나로 통합하여 물리적 공장과 디지털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동기화되도록 만든 것이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이 단절된 데이터들을 연결하여 배터리 셀 하나하나의 ‘데이터 계보Data Lineage’를 만드는 것이었다. 파운드리는 공장 내의 모든 기계, 센서, 원자재, 작업자 데이터를 ‘온톨로지’로 통합했다. 이제 엔지니어는 특정 배터리 셀의 일련번호를 클릭하는 것만으로 그 셀이 언제, 어떤 기계를 거쳤으며, 당시의 공정 조건은 어떠했는지를 타임라인 형태로 한눈에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통합된 시야는 놀라운 발견으로 이어졌다. 특정 라인 수율이 급격히 떨어졌을 때, 과거처럼 기계를 멈추고 테스트를 반복하는 대신 파운드리의 AI가 수백만 개의 셀 데이터를 순식간에 역추적하여 불량이 발생한 셀들의 공통 패턴을 찾아냈다.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는 연결할 수 없었던 미세한 공정 변수(예 : 특정 오븐의 배기 팬 회전수 저하)가 며칠 뒤 불량으로 이어진다는 인과관계를 밝힌 것이다.
원인을 알게 되자 대응 방식이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이제 시스템이 수동적인 분석을 넘어 ‘능동적인 제어’를 하게 된 것이다. 공정 변수가 임곗값를 벗어나는 징후를 보이면, 불량이 생기기 전에 실시간으로 경고를 보낸다. 과거 사람이 일일이 확인해야 했던 기계의 이상 징후를 AI가 미리 감지하고 최적의 설정을 제안하는 ‘사전 예방' 체제로 바뀐 것이다. 나아가, 온톨로지는 설비 제어 시스템에 직접 명령을 내려Write-back 조건을 자동으로 일정하게 유지한다. 덕분에 파나소닉은 연간 수백만 달러의 폐기 비용을 절감하고 라인 가동 시간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엔지니어들은 더 이상 데이터를 찾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파운드리가 제공하는 단일 진실 공급원을 통해 즉각적이고 정확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파나소닉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 강력한 데이터 기반을 활용하여 ‘순환 경제Circular Economy’ 시스템까지 구축하고 있다. 배터리 생산부터 사용, 폐기까지 전체 생애주기를 추적하는 것은 EU 배터리 규제 등 환경 규제 준수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파운드리를 통해 축적된 데이터를 분석하여 폐배터리의 재사용(ESS 등) 또는 재활용(광물 추출)을 최적화해, 파나소닉은 자원 낭비를 최소화하고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하는 비즈니스 모델로 확장하고 있다. 이는 데이터가 공장 내부의 효율성을 넘어 거시적인 자원 문제까지 해결하는 핵심 열쇠가 될 수 있음을, 그리고 제조업이 하드웨어 경쟁을 넘어 소프트웨어 운영 능력의 경쟁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리어 Case : 4시간의 전쟁, ‘시트’가 자동차보다 먼저 도착하는 마법
자동차 시트는 단순한 의자가 아니다. 수천 가지의 옵션 조합과 350개 이상의 부품이 들어가는 복잡한 모듈이다. 전 세계 175개 공장을 운영하는 글로벌 시트 제조사 리어Lear는 매일 피 말리는 시간과의 싸움을 벌인다. 완성차 공장에서 ‘검은색 가죽, 열선 포함, 전동식 시트 1개’라는 주문이 떨어지면, 리어의 공장은 단 4시간 안에 부품을 조달하고, 조립하고, 검수하여 완성차 라인의 정확한 순서에 맞춰 배송해야 한다. 1분이라도 늦으면 완성차 공장의 라인이 멈춰 서는 대형 사고가 터진다. 문제는 ‘돌발 상황’이다. 부품 트럭이 늦거나, 갑작스러운 설비 고장이 발생하거나, 갑자기 완성차 공장에서 ‘순서를 바꿔줘!’라는 긴급 요청이 들어올 때다. 과거에는 생산 관리자가 엑셀과 전화를 붙들고 수십 명의 담당자와 고함을 지르며 스케줄을 조정해야 했다. 하지만 175개 공장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수천 건의 의사결정을 인간의 머리로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이는 잦은 항공 배송 비용과 재고 낭비로 이어졌다.
이에 리어는 팔란티어와 함께 ‘적기 생산 방식JIT, Just-in-Time 관제탑’을 구축했다. 이제 긴급 주문이 들어오면 공장의 사이렌이 울리는 대신 AIP 스케줄링 에이전트가 조용히 계산을 시작한다. AI는 현재 라인의 부하, 부품 재고, 작업자의 숙련도를 0.1초 만에 분석하여 ‘이 긴급 주문을 3번 라인의 14시 15분 슬롯에 끼워 넣고, 기존 주문은 4번 라인으로 돌려라’라는 최적의 시나리오를 제안한다. 관리자가 승인 버튼을 누르면, 시스템은 제조 실행 시스템에 직접 명령을 내려 기계의 세팅을 바꾸고, 부품 창고의 로봇에게 ‘지금 당장 3번 라인으로 가죽 원단을 보내라’고 지시한다.
이제 리어의 공장 관리자는 엑셀과 씨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태블릿을 들고 현장을 돌며 AI가 처리하지 못하는 복잡한 문제, 즉 품질 이슈나 안전 같은 진짜 중요한 문제를 챙긴다. 리어의 사례는 제조업의 미래가 ‘더 빠른 기계’가 아니라, 그 기계들을 춤추게 만드는 ‘더 똑똑한 소프트웨어’에 있음을 보여준다. 4시간의 데드라인 안에서 인간과 AI가 만들어내는 이 정교한 협업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디지털 장인 정신’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