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왜 화를 내면서도 게임을 할까? | 통제와 고통

이 글은 [우리는 왜 게임을 하는가?]에서 발췌했습니다.
글 그림 하얀쥐 / 골든래빗 출판사

제아무리 대단한 엔진을 만들어도 연료가 없으면 작동하지 않듯이, 게임이라는 고도의 놀이기구 역시 감각적 보상이 없으면 진행되기 어렵습니다. 조작에 익숙해지는 과정도, 숫자를 읽어나가며 학습하는 과정도 주기적으로 주어지는 감각적 보상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죠. 인기있는 게임들은 대개 훌륭한 조작 반응과 시청각 효과들로 손끝에서 불꽃이 튀는 듯한 쾌감을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쉽게 관찰되기에, 게임이 가진 이미지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독적인 자극물의 예시로 게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전 내용에서 살펴봤듯이 조작이 가진 효과는 그렇게까지 극적이지 않습니다. 게임 캐릭터에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가고, 남는 것은 게임플레이라는 이름의 디지털 업무와 근 10년간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니터와 스피커의 출력 정보뿐이죠. 더 큰 데미지로 더 빠르게 몬스터를 잡으며 더 적은 조작 대비 더 강한 자극으로 나아가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조작하지 않고 유투브 쇼츠나 돌리는 것이 가장 편하고 자극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실제로 이런 상황에 직면한 후 게임이라는 취미를 내려놓는 사람도 많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쾌감의 역인 고난의 서사를 인식하고 즐기는 사람들입니다. 고통을 선택하는 것은 성취과제를 선택하는 것과 궤를 같이하지만, 그 둘이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이 단계에서 게임은 실질적인 성취가 아닌 감상에 가깝기에 때론 성취과정과 무관한 고통의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니까요.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는 더 발달된 디지털 출력 장치인 ‘촉각 수트’가 등장합니다. 주인공은 이 전신 장비를 통해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낄 뿐만 아니라 강렬한 타격에 의한 통각을 느끼기도 합니다. 고통을 거르지 않고 함께 받아들이는 것에 더 높은 가치를 투영하는 이 연출은, 변하지 않는 게이머의 성질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자극만을 받아들인다면 애초에 놀이라 부를 수도 없을 겁니다.

다만 우리가 어떤 순간에 고통, 쾌감, 무자극 사이를 오가는지 확인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게임 환경은 얼핏 동일한 조건처럼 여겨지기 쉽지만, 오히려 게임이야말로 인간 개개인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입니다. 현실의 우리는 그 자체로 서로 다르기에 각자의 상이한 경험과 반응을 받아들이는 것이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게임 속에서만큼은 비슷한 내용을 조작하고 수행하게 되므로, 같은 게임에 완전히 다른 반응이 일어날 때 더 크게 놀라기 마련입니다. 유명 게임들을 즐기지 못해 스스로가 이상한 것은 아닌지 걱정하거나, 자신이 싫어하는 게임이 인기를 끌 때 기괴함을 느끼기도 하죠. 취향의 차이와 그에 따른 괴리감은 모든 미디어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자신이 직접 참여하여 플레이하는 게임에서는 그 괴리가 더욱 극단적입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보통 고통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일어납니다. 내가 재밌어하는 것을 남이 재미있어하지 못하는 것은 이상할 것 없지만, 내가 어떤 게임에서 겪은 끔찍한 고통을 누군가는 적절하다 여기는 것이 너무나도 기이한 겁니다.

따라서 고통이야말로 개인 취향의 핵심에 가깝습니다. 산을 오르내릴 때 근육의 통증, 낚시의 입질을 기다리는 먹먹한 시간들, 온 몸의 마디마디에 근육기억을 때려넣으며 운동기술을 늘리는 과정, 어려운 퍼즐에 골머리를 앓거나, 요리의 재료를 손질하는 귀찮은 잡일들. 각 경험의 열매가 달콤하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지만,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취향’이 갈리는 것이죠.

그렇다면 게임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고통을 느끼며 어째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일까요? 더 나아가 우리에게 일도 아니고 휴식도 아닌 ‘놀이’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게임이 우리에게 실제 전기 충격 따위를 가하지는 않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디지털 신호만으로 그것을 가장하는 게임 경험은 고통의 조건을 더욱 면밀히 살펴보는 기회가 될 겁니다.

 

 

게임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쾌감의 역인 고난의 서사를 인식하고 즐기는 사람들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일도 아니고 휴식도 아닌 ‘놀이’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통이야말로 개인 취향의 핵심에 가깝습니다. 산을 오르내릴 때 근육의 통증, 낚시의 입질을 기다리는 먹먹한 시간들, 온 몸의 마디마디에 근육기억을 때려넣으며 운동기술을 늘리는 과정, 어려운 퍼즐에 골머리를 앓거나, 요리의 재료를 손질하는 귀찮은 잡일들. 각 경험의 열매가 달콤하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지만,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다르기 때문에 각자 선호하는 놀이가 달라지는 것이죠.

게임 활동의 동력으로 감각적 보상이 자주 소개되지만, 현대사회에는 이미 게임보다 쉽고 편한 자극물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쾌감의 역인 고난의 서사를 인식하고 즐기는 사람들이죠. 게임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고통을 느끼며 어째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일까요? 더 나아가 우리에게 일도 아니고 휴식도 아닌 ‘놀이’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글 ・ 그림 하얀쥐

마이너한 게임 세계를 파고드는 웹툰 작가. 조형예술과 출신으로 그 전공을 살려 잘 알려지지 않은 게임 담론을 다양한 관점으로 풀어낸다. 교양만화플랫폼 이만배에서 〈하얀쥐의 게임 프리즘〉을 연재 중이다.

 

웹툰 연재작

° 〈하얀쥐의 게임 만화〉

° 〈하얀쥐의 게임 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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