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우리는 왜 게임을 하는가?]에서 발췌했습니다.
글 그림 하얀쥐 / 골든래빗 출판사
우리가 비디오 게임을 주제로 삼고 이야기할 때, 그 대상은 보통 RPG(Role-Playing Game)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플레이어를 대변하는 캐릭터를 구성한다’, ‘스탯이나 재화 등 숫자로 표상되는 대상이 있다’, ‘장기적 목표를 갖는다’ 등 게임의 필수요소는 아니되 RPG의 특징인 것들이 게임 담론에 자주 오르내리곤 하죠.
스포츠나 보드게임 등 비디오게임과 유사한 규칙을 가진 놀이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자신의 아바타를 운용하는 놀이는 비디오 게임으로 구현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그러니 RPG 요소가 비디오 게임 자체의 특징처럼 여겨지는 것이죠. 또한 게임 업계 속 다양한 장르에 RPG 요소가 스며들기도 했습니다. 현재 가장 크게 성공한 E-스포츠 게임인 〈리그 오브 레전드〉는 MOBA(AOS)에 속하는데, 이 장르는 이전 세대 E-스포츠 왕좌를 차지했던 RTS에 단일 캐릭터 성장 요소, 즉 부분적인 RPG 요소를 적용한 형태로 해석되고 있죠.
또한 최근 FPS 인기작들과 이전 세대 FPS의 왕좌를 차지했던 〈카운터 스트라이크〉를 비교해 봐도, 각 플레이어 캐릭터의 차별화된 역할과 커스터마이징 기능이 크게 발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단 RPG 장르에 속한 게임만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투영되는 캐릭터를 만드는 기능’은 현대 게임계에서 강하게 추구되는 요소인거죠.
그만큼 RPG라는 개념은 수많은 개별 게임들에 관계되어 있고, 이제는 가장 정의내리기 힘든 게임 장르가 되어버렸습니다. 게임은 소비자와 상호작용하는 형태가 다양하기에 장르를 정의내리기가 특히 어려운 미디어입니다만, 그중에서도 RPG는 유독 이야기하기 어려운 주제입니다. 마치 ‘예술’이 그때그때 의미가 바뀌듯이 RPG 역시 상황에 따라 달리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어떤 게임에 ‘RPG 요소가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일반적으로 캐릭터를 단계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플레이어는 보통 이런 게임에서 캐릭터 빌드(Build)를 구축하고 효율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하게 되죠.
반면 특정 RPG, 특히 CRPG라 불리는 장르에서는 ‘선택이 고민될 때는 RP를 해라’라는 경구가 있습니다. 여기서의 RP(Role-Play)는, 마치 배우처럼 특정 캐릭터 역할을 투영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어떤 선택이 효율적인 선택인지 알 수 없을 때 효율 대신 컨셉을 중시하라는 뜻이죠.
두 의미의 ‘역할 놀이’를 접붙이면 아래와 같은 이상한 문장이 탄생합니다.
‘RPG 요소(캐릭터의 양적 성장)에 경도되지 말고 RP(극중 캐릭터의 역할과 성격 수행)를 중시하라’
현 시대 게임 용어가 얼마나 복잡한 미궁에 빠져 있는지 체감되시나요?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여러 갈래의 RPG들이 모두 방대한 양의 수(Number)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 숫자들은 RPG의 태동기에 여러 방면으로 뻗어나가는 다양한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고안되었죠. 타인에게 호감을 사는 A 캐릭터가 까칠한 성격의 B 캐릭터를 설득해낼 때, A 캐릭터가 가진 설득 ‘능력치’가 높아 B 캐릭터의 설득 ‘난이도’를 뚫어냈다고 표현하는 식입니다. 이렇게 구성하면 게임 마스터가 모든 상황을 미리 준비하지 않아도 다양한 이야기를 연출할 수 있죠.
그런데 이 숫자들은 이야기를 표현하는 언어인 동시에 게이머의 행동을 고취시키는 강화물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설득 캐릭터라면, 놓여진 상황과 무관하게 설득 능력을 강하게 키우려고 노력하겠죠. 설득 +5짜리 고급 의상을 입는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이에 더해 게임 마스터가 설득 능력의 상한을 10,000까지 늘리고 훈련을 통해 하루에 최대 10씩 상승시킬 수 있으며 최종 목표가 되는 설득 대상들의 난이도를 9,000 이후로 설정한다면 어떨까요? 그저 수치만 바꿨을 뿐이지만, 이 게임은 더 이상 여러 캐릭터와의 관계와 이벤트를 보는 게임이 아닌, 특정 강화물을 축적하는 게임으로 바뀔 겁니다. 같은 것을 표현하는 숫자이지만 참여자의 태도나 상황에 따라 같은 숫자가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겁니다.
수의 유연함은 RPG를 정의내리기 어렵게 만들었을뿐만 아니라 게임을 판단하고 소통하는 데에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콘텐츠를 즐기는 티켓으로서 게임 속 무기를 구매했는데 하루 만에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무용지물이 되기도 하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이미지를 맞추는 순발력 게임이 갑자기 속도를 빠르게 올려 운을 시험하는 슬롯 머신으로 바뀌기도 하죠. 이는 단순한 소통의 어려움을 넘어 법적 공방으로 번지기도 하는 심각한 문제입니다만, 그저 수치만으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명확한 기준을 세우기도 어렵죠.
이렇듯 각 숫자가 어떻게 조합되고 어떤 경험으로 변화하는지를 추적하는 것은 매우 지난한 일입니다만, 게임 속 숫자가 어떻게 조합되고 어떤 경험으로 변화하는지를 이야기하지 않고 게임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수는 게임의 공학이자 문법, 아 다르고 어 다른 섬세한 표현재료니까요.
글 ・ 그림 하얀쥐
마이너한 게임 세계를 파고드는 웹툰 작가. 조형예술과 출신으로 그 전공을 살려 잘 알려지지 않은 게임 담론을 다양한 관점으로 풀어낸다. 교양만화플랫폼 이만배에서 〈하얀쥐의 게임 프리즘〉을 연재 중이다.
웹툰 연재작
° 〈하얀쥐의 게임 만화〉
° 〈하얀쥐의 게임 프리즘〉